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마도 정벌 (문단 편집) ==== 철수 ====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는 조선군이 오래 머물 것을 두려워해 글을 받들고 군사를 물러 수호(修好)하기를 빌면서 말했다. >7월 사이에는 항상 풍파의 변이 있으니, 오래 머무름이 옳지 않습니다. 이에 원정군은 태풍이 올 것을 우려하고 요동으로 북상한 왜구 주력부대가 귀환할 시기가 되어 이들을 조선 연안에서 요격해야 할 2차 작전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7월 3일 대마도에서 철수해 거제도로 돌아갔다. 7월 7일, 태종은 이종무를 의정부 찬성사, 이순몽을 좌군 총제, 박성양을 우군 동지총제로 삼는 등 원정군을 이끈 제장들의 직급을 높이고 전투에서 죽은 병마부사 이상에게 쌀과 콩 각각 8석, 군관은 사람마다 각각 5석, 군정은 사람마다 3석을 주게 했다. 그리고 동지총제 이춘생을 보내 원정을 갔다 돌아온 군영에 가서 술로 제장들을 위로하게 했다. 그러나 7월 4일 왜구의 전선 2척이 안흥량에 들어와 전라도의 공선 9척을 노략하고 대마도로 가는 일이 벌어지자, 태종은 대마도롤 재정벌하는 문제를 고려했다. 태종은 유정현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중국으로부터 돌아온 적선 30여 척이 이달 초3일에는 황해도 소청도에 이르고, 초4일에는 안흥량(安興梁)에 와서 우리 배 9척을 노략하고 도로 대마도로 향하니, 우박과 권만으로 중군 절제사를 삼고, 박실과 박초로 좌군 절제사, 이순몽과 이천으로 우군 절제사를 삼아, 각각 병선 20척을 거느리게 할 것이니, 도체찰사가 다 거느리고 다시 대마도로 가되, 육지에 내려 싸우지는 말고,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에 떠서 변을 기다릴 것이며, 또 박성양으로는 중군 절제사를, 유습으로는 좌군 절제사를, 황상으로는 우군 절제사를 삼아, 각각 병선 25척을 거느리고 나누어 등산(登山)·굴두(窟頭)와 같은 요해처(要害處)에 머무르게 하고, 적의 돌아오는 길을 맞아 쫓으며, 협공으로 반드시 대마도까지 이르게 하라. 그러나 우의정 이원이 "군사들의 예기가 이미 쇠하고 선박의 장비가 또한 파손되었고, 더구나 천후가 점점 바람이 높으니, 멀리 불측한 험지를 건너가다가 혹 생각치 않은 변이 있으면 뉘우쳐도 따를 수 없을 터이니, 바람이 평온해지기를 기다려 군사를 정제하여 다시 쳐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하자 그 말이 옳다고 여기고 대마도 재정벌을 미뤘다. 이때 대마도로 막 가려던 원정군은 태종의 지시를 받고 구량량에 정박했는데, 7월 15일 밤에 동풍이 폭풍우를 타고 급히 불어와 병선 7척이 파괴되고 1척은 배 전체가 뒤집혀서 빠져 죽은 이가 7명이었으며, 8척은 바람에 휩쓸려 행방을 모르게 되었다. 이후 태종은 요동 총병 유강이 망해과 전투에서 왜군을 괴멸시켰다는 소식을 듣자 대마도 재정벌을 완전히 중단하고 각 장수들에게 전라, 경상도의 요해처에 보내 엄히 방비하며 왜구가 대마도로 귀환하는 걸 기다렸다가 추격하여 잡게 했다. 그러나 왜구는 한반도를 들리지 않고 곧장 대마도로 돌아갔기에, 조선군은 그들을 잡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